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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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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
산 // 김영석 아주 먼 옛날 가슴이 너무나 무겁고 답답하여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한 사내가 밤낮으로 길을 내달려 마침내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길 끝에 이르렀습니다 그 길 끝에 사내는 무거운 짐을 모두 부렸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그 길 끝에 이르러 저마다 지니고 있던 짐을 부리기 시작하고 짐은..
산행2 // 마종기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
겨울산 // 정일근 첫눈 맞고 있는 겨울산을 보면 흰 털 세운 한 마리 산짐승 같으니. 부드럽게 웅크린 등줄기나 가슴께로 바짝 당겨놓은 살진 허벅지 이놈아, 하고 툭툭 치면 웅크렸던 몸 긴 기지개 한번 켜고는 산길 따라 세차게 달려갈 것 같으니. 이 땅 어느 산을 올라도 모든 길은 백두에 닿는다는 백두..
눈 온 아침 // 신경림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도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는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2012년 12월 31일 지리산 바래봉 아래서
산정묘지( 山頂墓地 ) 1 // 조정권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 정호승 2012년 1월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며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
겨울에게 // 마경덕 내가 앉았던 자리가 그대의 지친 등이었음을 이제 고백하리.그대는 한 마리 우직한 소. 나는 무거운 짐이었네. 그대가 가진 네 개의 위장을 알지 못하고 그대를 잘 안다고 했네. 되새김 없이 저절로 움이 트고 꽃 지는 줄 알았네. 그대가 내뿜는 더운 김이 한 폭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