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P/시

(93)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을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 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2012년 10월 영남알프스 천황재에서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
선암사 // 정호승 2012년 11월 선운사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
사랑의 허물 // 윤후명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하고 싶었다 나이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마음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헤어지는 연습으로만 살아왔다 헤어져서는 안 된다 하면서도 그 나무 아래 그 꽃 아래 그 새 울음소리 아래 모두 사랑의 허물만 벗어놓고 나는 어디로 또 헤매고 있을까 언제까..
바람 // 김재진 지도 펴놓고 들여다보라 가고 싶지 않은가 주왕산 월악산 덕유산 매화산 꺽정이 발길 따라 묘향산과 구월산 마천령 서쪽으로 백석 시인 살던 곳 가고 싶지 않은가 여량리 봉평리 문곡리 미천리 미치듯 미칠 듯 가고 싶지 않은가 안나푸르나 강가푸르나 초오유 마칼루 칸젠중가 바라뵈는 ..
아름다운 수작 // 배한봉 서리산에서, 2012년 5월 봄비 그치자 햇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
천의 바람 // 원작자 미상 내 무덤가에서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없는 새이며..
길 // 마종기 2012년 5월, 연화도 가는 길에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 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 같이 늙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바닷바람은 속살같이 부드럽고 잔 물살들 서로 만나 인사 나눌 때 물안개에 덮인 집이 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