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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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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미지// 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
살면서 가끔은 울어야 한다// 고창영 살면서 가끔은 울어야 한다 곪은 상처를 짜내듯 힘겨운 세상 살아가면서 가슴 한가운데 북받치는 설움 때론 맑은 눈물로 씻어내야 한다 2013년 12월 캄보디아 앙코르 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
가을 잎사귀 // 복효근 귀, 잎사귀라 했거니 봄 새벽부터 가을 늦은 저녁 까지를 선 채로 귀를 열고 들어왔나니 비바람에 귀싸대기 얻어터져가며 세상의 소리 소문 다 들어 왔나니 그리하여 저 귀는 바야흐로 제 몸을 심지 삼아 불 밝힌 관음의 귀는 아닐까 이 가을날 물드는 나무 아래 서면 발자국소리 하나 관..
따뜻한 적막 // 김명인 2013년 11월 월출산에서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
사는 일도 때로는 // 정성수 나이 들수록 그대여 사는 일도 때로는 쓸쓸하여라 밤 깊은 도봉(道峰)위에도 별은 보이지 않고 꽃 같은 사랑도 추위의 늪을 건너오지 못하여 먼 곳에서 뒤척이며 홀로 잠든다 온밤을 지새운들 한 잔 술이 어찌 내 앞에 불을 켜리오 흰 종이 위에 떠도는 싯귀절도 오늘은 부질없구나 죽음..
사색의 다발 // 이기철 흙탕물은 아무리 흐려도 수심 위에 저녁별을 띄우고 흙은 아무리 어두워도 제 속에 발 내린 풀뿌리를 밀어내지 않는다 벼랑위의 풀뿌리는 제 스스로는 두려워 않는데 땅 위의 발 디딘 사람들만 그 높이를 두려워한다 즐거움은 쌓아둘 곳간이 없고 슬픔은 구름처럼 흘러갈 하늘이 없다 201..
풍경을 읽다 // 이정화 2013년 10월 두타산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산 정상 군데군데 내려다보이는 길들이 흩어진 퍼즐의 조각처럼 숲을 자르고 있다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 사이에 잘못 들어간 접속사 갈래갈래 흩어진 풍경에서 나를 들어내면 비로소 완벽한 문장이 된다 올려다 볼 줄만 알았지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