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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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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없이 숲에 눕다 // 서홍관 구름 위로도 솔잎 위로도 뜻도 없고 이유도 없이 아무렇게나 뿌려지는 가을 햇살을 보며 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갈참나무인지 굴참나무인지 알 길이 없는 낙엽들이 뒤엉켜 쌓여 있는 숲그늘에 털썩 눕는다. 쉬잇! 이미 가을 벌레들이 자리잡고 쉬고 있는 중이다. 여보게 설마 날더러 나가..
무한 바깥 // 정현종 2012년 9월 고대산에서 방 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각인 // 배한봉 이름부터 아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길앞잡이, 각시붕어, 닭의장풀꽃 사는 법 알면 사랑하게 되는 줄 알았다 아이는 한 송이 풀꽃을 보고 갈길 잊고 앉아 예쁘네 너무 예뻐, 연발한다 이름 몰라도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눈빛만 빛내고 있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
그리움 // 이성부 낯선 길에 들어서야 나는 새로운 내음 가슴 가득히 채워 일어난다 이 길에서는 온통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이 나를 떠나 천리 밖을 떠돈다 절도 중도 없어 바위턱에 나를 앉히고 숨을 고르게 하고 내 몸도 알맞게 식혀 구름에게라도 맡겨야 한다 2014년 6월 덕유산 종..
곰배령 // 이석철 쑥부쟁이 물양주 산꼬리표 엉겅퀴 오리밥풀 배미추 금강초롱 궁궁이 어디에서 모여 왔는지 산길따라 바람따라 자리를 채우며 둥 둥 둥 봉화 올리던 곳, 미륵을 기다려 천배 만배 올리던 산마루에 애기앉은부처로 살아나고 당신의 아픔을 삭이며 자식들을 품에 안으시던 어머니처럼, 곰..
바람으로 살아라 // 정태숙 너, 그렇게 바람으로 살아라 수 억년을 헤메돌다 남해바다 따스한 모래밭 사각이는 모래틈에 얼굴 묻고 울어도 좋을 그런 바람으로 살아라 해가 뜨고 노을 짐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남해바다 외딴섬 동백의 눈매를 닮은 불 붙는 바람으로 살아라 언제나 일렁이는 그 가슴 풀어 헤치며 풀..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