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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터키

터키여행 5일(2), 앙카라의 아타튀르크 묘소

 

 

 

2012.6.5(화)

 

 

 

 

 

 

 

 

 

언젠가 터키는 지하철 노선마다 이름이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앙카라에는 두 개의 노선이 있다. 앙카라이와 메트로.

오토갈에 있는 지하철 노선 이름은 앙카라이, 여기서 네 정거장을 가면 탄도안 역에 이르고

아타튀르크 묘소로 갈 수 있다.

 

 

 

 

 

 

오후 12시 50분, 탄도안 역

 

 

탄도안 역, 보안이 철저하다. 권총을 찬 보안 요원들이 깔려 있다.

같은 이슬람권이면서도 과격 이슬람 단체들로부터 가끔씩 위협을 받고 있는 터키.

게다가 이 근처에 그들이 성지로 생각하는 아타튀르크 묘소가 있으니.......

 

 

 

 

 

 

 

 

 

탄도안 역 앞 사거리 코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 뉴욕에 간 적이 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청바지에 티 셔츠였지만, 월가에 갔을 때는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지금 이곳이 그렇다.

이스탄불과 사프란볼루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캐쥬얼을 입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정장 차림에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

도회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관광객이 별로 없는 탓인지 영어로 된 메뉴판이 없다.

오늘 점심은 스파게티로 선택. 페투치니 알프레도(Fettucini Alfredo).

젠장, 화이트 스파게티인 줄 몰랐다. 싱겁고 느끼하다.

 

이 집 메니저도 선글라스에 관심을 갖는다.

파이터 같다나? 그래, 타지에선 강해 보이는 것이 좋은 거야.

 

 

 

 

 

 

 

오후 1시 40분, 아타튀르크 묘소

 

 

탄도안 역에서 10여 분 걸어 올라가면 묘소가 있다.

여기서의 보안 검색도 철저하다.

당연히 배낭은 맡겨졌고, 작은 가방에 있던 미니 삼각대도 꺼내 놓았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동양인에 대한 차별 내지는 경멸을 가끔씩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터키 여행에서도 있었다.

서양인의 잘못은 실수로 인정하지만, 동양인의 실수는 냉소로 대답했다.

그러나 유적지 특히 이 아타튀르크 묘소를 입장할 때는

그들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자신들이 한없이 경배하는 인물을 보러 온 이 동양인이 얼마나 갸륵하냐는 듯이.

 

 

 

 

 

 

 

 

 

마치 미국의 국립공원을 들어가는 것처럼 넓직하고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500여 미터 걸어 올라간다.

 

 

 

 

 

 

 

 

 

저 위에 올라서면 참배로다.

 

 

 

 

 

 

 

 

 

24마리의 사자상들이 지키고 있는 참배로

 

 

 

 

 

 

 

 

 

 

 

 

 

 

 

 

 

참배로를 지나서

 

 

 

 

 

 

 

 

 

되돌아 본 참배로

 

 

 

 

 

 

 

 

 

ㅁ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오른쪽 끝, 회랑

 

 

 

 

 

 

 

 

 

맞은편이 본당이고 여기는 터키 공화국 2대 대통령인 이스메트 이노뉘 묘

 

 

 

 

 

 

 

 

 

회랑을 따라가다 보면 이처럼 아타튀르크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들이 있다.

 

 

 

 

 

 

 

 

 

 

 

 

 

 

 

 

 

기념품 점

 

 

 

 

 

 

 

 

 

마치 거대한 궁전같다. 1944년 착공해 1953년에 완공한 건물.

터키의 주요 국가 행사가 열리고, 터키를 방문한 국빈들이 맨 먼저 방문하는 곳.

마치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만든 건조물처럼 다소 지나치다는 느낌을 주는 건물.

왜 그들은 아타튀르크에 열광하는가?

 

그는 오스만 제국의 점령 하에 있던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무스타파.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에 입대하는데, 군사학과 수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여

케말(완벽)이란 별칭이 덧붙는다.

 

 육군 참모 대학 시절 진보정치 세력 비밀 결사체인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한다.

이 전력 때문에 변방을 떠돌게 되는데 대령 시절 영국군의 갈리폴리 상륙 작전을 부숴

파샤(군 사령관 또는 고급 관료에게 덧붙이던 별칭)란 이름까지 더해진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

 

세계 제1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를 거듭하지만,

그가 이끄는 군대는 수많은 승전을 올려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오스만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해 연합국으로부터 여러 강요를 받고 있던 1920년,

 그는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년간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하여 그리스 점령군을 완전 격퇴한다.

그 결과 1923년 7월, 연합군과 로잔 조약을 체결하고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국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수구 보수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술탄제 폐지, 이슬람 전통 복장 폐지, 일부일처제 채택, 여성 참정권 허용, 남녀 교육 기회의 균등, 문자 개혁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겨

 터키가 다른 이슬람권 나라에 비해 상당히 민주적인 시스템을 갖도록 하는데 커다란 디딤돌을 놓는다.

 

마침내 터키 국회는 1934년 '아타튀르크(튀르크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1938년에 영면. 이제 공식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그의 이름 속에 그의 운명이 있고, 터키의 근현대사가 있다.

 

 

 

 

 

 

 

 

 

저 끝에 그의 관이 있다.

후대의 권력자들이 선대의 권력자를 우상화하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국민적 통합, 자신의 안전, 그리고 자신의 사후까지 계산하면서.

그러나 내가 터키여행에서 느낀 것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지배층에 의해 우상화되었다기보다 실제 국민들 마음속에 그는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터키 어느 곳을 가든 터키 국기와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고,

대화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존경의 눈빛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철학이 얼마나 영향이 큰지 나타내는 구체적 사례가 있다.

터키의 최고 헌법 기관인 헌법재판소는

1996년과 2001년에 집권당이 이슬람 교리를 정치에 끌어들였다는 판단하에

집권당의 해산을 명령한 적이 있다.

오늘날 터키가 다른 이슬람권 나라들과는 달리

답답한 정치를 하지 않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현재 터키에서 보수 세력은 집권당을 비롯한 과반수 이상의 정치인들이고

(그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이슬람 사제들과 끈이 닿고 있다)

진보 세력은 군인, 판검사들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왜 근현대사에서 이런 인물이 없을까?

건국 과정에서 집권 전, 집권 과정, 집권 후가 완벽한 지도자가.

 

김구와 이승만이 저 위치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김구는 1945년 독립군 특수부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독립을 우리 손으로 얻어내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실천되지 못한 아름다운 꿈으로 끝난다.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면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로 독립을 호소했지만

이 역시 독립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오히려 그가 모금한 독립자금 때문에 끊임없이 상해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해방 이후의 상황 전개도 그렇다.

김구는 자신의 국가 통치 철학을 펼치지도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승만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간다.

항일독립투사들이 대부분 김구 편에 서자

경험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비극적인 해방전후사를 써내려간다.

 

어떤 이는 저 자리에 박정희를 꼽으려 할 것이다.

그의 경제적 업적을 아무리 후하게 쳐준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흠결들이 너무 많다.

집권 전 독립군들이 활약하던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던 점,

학생들이 사일구 혁명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집권 과정이 헌법 파괴에 의해서 이루어진 점 등이다.

 

 

 

 

 

 

 

 

이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 하나를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이날 앙카라의 기온은 40도에 가까웠고, 내가 터키여행 하던 중 가장 무더웠던 날이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회랑 주위로만 돌고 있었고 건물이 온전하게 나올 수 있는 이 자리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때 마침 여군 한 무리를 이끌고 온 남자 군인이 그들 단체 사진을 찍었고,

그 다음 내 차례가 되었다.

역시 신성시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초등학생 중학생 단체 관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내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마치 김일성 동상을 보는 듯

 

 

 

 

 

 

 

 

 

 

 

 

 

 

 

오후 3시, 아타튀르크 묘소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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