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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터키

터키여행 2일(1), 히포드롬

 

 

2012.6.2(토)

 

 

 

 

 

 

 

오전 6시 20분, 숙소를 나서다.

 

 

잠은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벌써 깼다.

여기는 이스탄불, 맘이 설렌다.

성 소피아 성당은 개장 시각인 9시에 맞추어 가고, 그 전에 히포드롬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이 사진은 야카모즈 2층에 있는 식당.

 

 

 

 

 

 

 

 

 

성 소피아 성당.

야카모즈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나갈 때나 들어올 때 늘 이 건물과 블루모스크를 지난다.

 

 

 

 

 

 

 

 

 

블루모스크

 

 

 

 

 

 

 

여기서 잠시 이스탄불의 역사를 살펴보자.

도시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660년 경 고대 그리스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다. 당시 이름은 비잔티움.

그 후 페르시아와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330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결정되면서 이름이 콘스탄티노플로 바뀐다.

그리고 1453년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제국이 점령하면서

이스탄불로 이름이 다시 바뀐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건설되면서 수도가 앙카로로 변경되지만

이스탄불은 그 유구한 역사와 함께 숱한 고대와 중세의 유적을 간직하고 있어

유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면적은 서울의 2.5배이지만, 인구는 비슷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벤허'를 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박진감 넘치던 전차 경기와 관중들의 광기 어린 함성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 전차 경기가 열렸던 경기장을 히포드롬이라 부른다.

이 히포드롬에선 전차경기뿐만 아니라

국가의 주요 행사도 거행되었다.

히포드롬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여러 곳에 건설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동로마제국 시절 이곳에 세워진 히포드롬이란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한 이 히포드롬은

가로 120m 세로 500m의 거대한 경기장이었으며

10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한다.

입구가 트인 U자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물론 다른 경기장들도 다 그런 모양이었겠지만)

경기장 중앙분리대 용도로 세 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은 이 기둥들만 남아

동로마제국의 위용을 전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사이에 있는 술탄아흐메트 공원 바로 옆에 있다.

 

 

 

 

 

 

 

 

 

광장 맨 위쪽에 있는 오벨리스크.

기원전 1490년 경 이집트 투트모세 3세 시절 건조된 것으로,

룩소 카르나크 신전에 있던 것을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옮겨왔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며 3500년의 기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사원의 입구에 세워졌던 거대한 돌탑으로 분홍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태양신에 대한 헌사 또는 왕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의 글이 본체에 새겨져 있다.

 

 

 

 

 

 

 

 

 

아래에는 조각상이 있다.

 

 

 

 

 

 

 

 

 

 

 

 

 

 

 

 

 

이곳의 역사성이나 여행객의 호기심도 그에겐 관심이 없다.

 그에겐 이곳이 하나의 잠자리일 뿐이다.

토요일 이른 아침, 호기심 많은 나만 이 거리를 걷는다.

 

 

 

 

 

 

 

 

왕가 인물들의 조각상?

 

 

 

 

 

 

 

 

 

기원전 490년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그 기념으로 만든 청동뱀상.

그리스 델피 아폴로 신전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원래 윗부분에 세 마리 뱀이 또아리를 틀고 황금항아리를 받쳐들고 있었는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소실되었고,

뱀의 머리 부분만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메 남아 있다.

 

 

 

 

 

 

 

 

 

 

 

 

 

 

 

 

 

 

 

 

 

 

 

 

 

또 하나의 오벨리스크인 일명 벽돌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에 의해 건조된 것으로 원래는 금도금을 한 청동판이 맨 윗부분에 있었다.

그러나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그들이 가져갔다.

 

 

 

 

 

 

 

 

 

 

 

 

 

 

 

 

세계사 책에서만 보던 글씨 그림 그리고 건조물.......

 

 

 

 

 

 

 

 

 

 

 

 

 

 

 

 

그리스어 hippos(말)와 dromos(말)의 합성어인 히포드롬.

말들이 달리던 트랙 위는 지금 벽돌로 포장이 되어 있어 그 흔적이 사라졌다.

전차 경주 이외에도 광장의 역할을 해 정치적 집회, 군사 모임, 대공연 등도 열렸다.

 

이 히포드롬에서 일어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은 '니카'반란이다.

전차 경주가 열릴 때 군중들은 적 청 백 녹색의 옷을 입고 각자의 팀을 응원했는데,

점차 청색과 녹색의 두 팀만 남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팀들은 정치적 경제적 계급적 성격을 갖게 되고

청색은 귀족을, 녹색은 상인 및 기술자 등 중산층을 대변한다.

두 팀의 대결은 오늘날 축구에서 '더비'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면서

격렬한 응원전이 펼쳐졌다.

 

동로마제국 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래 청색군의 지원하에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파적 색채가 강했던 두 팀에 대해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

마침 532년 어느날 경주가 끝난 후 두 팀의 응원단이 충돌을 일으키자

황제는 양쪽에 대해 모두 강력하게 제재한다.

그러자 두 팀의 군중이 힘을 합쳐 황제에게 저항했고, 위기를 느낀 유스티니아누스는 잠시 피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황후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며칠 뒤 다시 열린 전차경주 때 무자비한 진압을 벌여 3만여 명이 죽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군중들이 외친 함성이 '니카'(이기자)다.

 

 

 

 

 

 

 

 

 

광장 한켠에 있는 카이저 빌헤름 샘.

1901년 독일 황제 빌헤름 2세가

제1차 세계대전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선물한 것.

한켠엔 수독꼭지가 있는데, 아직도 물이 나오고 있다.

 

 

 

 

 

 

 

 

 

정자 내부 천장의 금색 장식

 

 

 

 

 

 

 

 

 

 

 

 

 

 

 

 

 

 

 

 

 

 

 

 

 

돌아오는 길에 본 성 소피아 성당,

이제 아침 식사를 마치면 저곳에 갈 예정이다.

공원에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뜨이기 시작한다.

 

 

 

 

 

 

 

 

 

 

 

 

 

 

 

오전 7시, 숙소에 돌아오다.

 

 

아침의 따스한 햇살을 받아 그럴듯한 모습을 드러낸 숙소 야카모즈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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