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천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산행에 나섰다.다음 목적지는 벽소령이다.연하천대피소를 지난 다음,삼거리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천왕봉으로 향한다.누군가 '피의 능선'이라 불렀던 길이다.빨치산과 지리산 토벌대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능선이다.실제 이 능선 오른쪽 아래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는 소의 형상을 닮은 지리산의 등뼈를 밟는 산행이다.서쪽 노고단에서 동쪽 천왕봉까지 장장 25km에 이르는 길로,남한에서 가장 길고 높은 산마루길이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을 선사하는 커다란 쌍바위가 등장한다.이런 코스가 세 번 나타
난다.
저 길을 걸어 걸어 왔다.
벽소령대피소까지 다소 까탈스러운 길을 걸어야 한다.점점 힘겨워진다.더위와 어제 한 시간 밖에 자지 못한 탓에 그 힘겨움이 더했다.그러나 웅대한 지리산 자태가 힘을 불어 넣어 준다.이제 벽소령이다.구한말 당시 의병대장이었던 김동신이 넘나들던 곳이다.지리산은 설악산과는 달리 이처럼 곳곳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 많아 걷는 이의 마음을 더 숙연케 해 준다.
벽소령대피소
지리산 10경 가운데 하나가 벽소명월이라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갈 길이 바쁘다.그 달을 볼 시간이 없다.잠시 이 곳에서 스포츠 음료를 하나 먹은 후 다시 출발한다.이제 목표는 오늘의 숙박지인 세석대피소다.중간에 선비샘과 칠선봉을 지날 것이다.
멀어져가는 벽소령대피소
벽소령을 지나면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그리고 구벽소령이 나타나고,그 이후로 다소 완만한 오르막길이 나오다 선비샘과 마주친다.
산은 스스로 높다고 말하지 않고
산은 스스로 춥다고 말하지 않는다
산은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고
산은 기다리지도 가지도 않는다
단지 사람이 산에 오르니 산이 높고
산 앞에 나약할 뿐
산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 하성목, 산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선비샘...아래 덕평마을에 가난하고 평생 천대 받던 노인이 살았다.이 노인은 죽으면서 죽어서라도 사
람 대접 한번 받았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긴다.이에 아들은 이 샘 위에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탓에 사람들이 이 샘에서 물을 먹을 때,무릎을 꿇고 그 무덤에 머리를 숙이도록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없고, 쇠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어 물을 먹을 때 무릎을 굽히지 않아도 된다.
선비샘에서 목을 축이고 잠시 일어선다.갑자기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지리산 주능선 코스 가운데 가장 힘든 코스다.여기까지 오느라 몸이 지칠대로 지쳤는데, 올망졸망한 바윗길을 쉼없이 오르내리고 비켜 가야 한다.그러나 그 바위들 위에 전망 좋은 자리들이 여러 곳 있어 그 힘겨움을 덜어 준다.
성삼재에서 주능선 종주를 시작할 때, 한 두 시간 차이로 출발한 탓인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주치는 사람들이 많았다.오늘따라 많은 젊은이들이 종주를 하고 있었다.교수와 함께 온 대학생들,친구들과 어울려 온 여고생들,아버지를 따라온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이들이 내가 자주 마주쳤던 종주자들이다.전망 좋은 바위 위에 풀썩 주저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우리 나라처럼 협소한 지형에서 지리산만큼이나 젊은이들에게 호연지기를 키워 줄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나도 저들만한 나이에 산행을 알고,지리산을 알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걸음을 다시 옮긴다.암릉지대가 나온다.흔히 지리산을 육산이라 하는데 특이하게도 암봉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지역이 나타난다.칠선봉이다.일곱개의 암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일곱 선녀가 노니는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칠선봉을 지난 다음 몇 개의 암봉을 더 지나야 한다.철계단을 오르고 내린다.아찔한 절벽 지대도 지난다.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게다가 안개까지 심하게 깔리기 시작한다.아침에는 별을 보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산행의 끝은 안개 속에 묻힐 것 같은 느낌이다.
언덕 위에 올라선다.영신봉이다.앞이 확 트인다.세석평전(細石平田)이다.말 그대로 잔돌이 많은 지대다.주변 둘레가 12km, 넓이가 약 30만평에 이르는 드넓은 고원지대다.한 가운데에 대피소가 있고,건너편에 촛대봉이 있다.그러나 아쉽게도 영신봉에서 바라보는 세석고원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가 없었다.준비한 삼각대가 고장이 났다.대신 어둠이 깔린 고원지대를 마음에 새겨 넣었다.
이 사진은 이튿날, 대피소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며 찍은 사진이다.따라서 저 건너편이 영신봉이다.
대피소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9시 정각,대피소 숙소의 모든 불이 꺼졌다.9시 30분,마음 속에 천왕봉을 끌어안고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이후 산행기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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