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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터키

터키여행 13일(3), 셀축의 성 요한 교회와 이사베이 자미

 

 

 

2012.6.13(수)

 

 

 

 

 

 

에페스 박물관에서 나와 10여 분 걸어가면 아야술룩 언덕 입구에 이르고 ,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면 성 요한 교회다.

나는 먼저 아야술룩의 성채를 구경하고 내려와 교회를 보기로 했다.

결국 이 선택이 대단한 해프닝의 원인이 된다.

 

 

 

 

 

 

 

 

2시 40분 성채 입구

 

 

왼쪽으로 담을 끼고 오르니 차량도 다닐 수 있는 커다란 문이 열려 있다.

 

 

 

 

 

 

 

 

 

왼쪽 맨 위의 집이 내가 묵었던 숙소.

 

 

 

 

 

 

 

 

 

 

 

 

 

 

 

 

 

 

 

성채 문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수 공사하고 있었다. 맨 앞에 있던 인부가 고개를 들었다.

_ 어이 캐나다인.......!

이건 또 뭔 소리람. 캐나다인? 나 보고 캐나다인이라니 ....... 그가 보았던 캐나다인들은 모두 동양계였단 말인가?

그는 영어라곤 그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출입할 수 없다는 표시를 한다.

_ 나 코리안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머뭇거리던 그는 십장인 듯한 사람에게 가 뭐라 말한다.

한참 후 돌아온 그는 역시 안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몇 번 더 부탁하다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곳이 휴장하는 날인가? 아아 그러고 보니 관광객이 아무도 없다!

휴장일을 맞아 보수공사를 하는구나!

 

 

 

 

 

 

 

 

 

 

억울한 마음이 든 나는 조금 더 둘러보며 조망을 즐겼다.

시원하다. 시원하다.

 

 

 

 

 

 

 

 

 

 

 

 

 

 

 

 

 

 

 

 

 

 

 

 

 

 

 

 

 

 

 

 

 

 

 

 

 

 

 

 

 

 

 

 

 

 

 

 

 

 

 

 

 

 

 

 

 

 

 

 

 

 

 

 

서서히 내려와 아까 들어온 문으로 다시 나가려할 때 깜짝 놀랐다.

잠시 전 열려 있던 문이 굳게 닫힌 채, 안쪽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빠져나갈 개구멍도 없었다!

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가면 성채요, 왼쪽으로 가면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조그만 언덕길이다.

문으로 나갈 수 없어 나는 그 언덕길로 꺾어져 잠시 걸었다.

앗! 조그만 초소가 있고 그 너머에 유적이 보인다. 성 요한 교회다!

그 초소에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하 저 초소는 교회 유적지 후문 경비초소로구나. 돌아가는 것보다 빨리 볼 수 있겠는데.......

 

 

유유히 그 초소 앞을 지나려는데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화를 낸다.

_ 헤이 잡

아니, 저 친구 물어보지도 않고 나 보러 일본인이라니? 짧은 시간에 나는 캐나다와 일본 국적을 옮겨다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아까와는 달리 난 내 국적을 밝히지 않았다.

_ 당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나는 들어오게 된 경위를 말했다. 그는 씩씩거리더니 나보고 빨리 내려가라고 소리친다.

터키여행하면서 숱한 경비원들을 만났지만 이토록 화를 내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뒷문으로 들어와 앞문으로 나간다고 뭐 그리 화낼 필요가 있어?  입장료 내면 될 것 아냐!

 

 

떨떠름하게 내려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조금 전 다가갔던 그 성채는 군사기지였으며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내가 방금 본 초소는 성 요한 교회 관람을 마친 관광객들이 성채로 오르지 못하도록 막는 경비초소였다!

그리고 처음 내가 들어간 문은 군 차량이 들락거리는 문으로

잠시 열어둔 순간 내가 모르고 들어간 모양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를 하지 않은 사람이 요한이다.

그는 예수의 부탁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셀축에 와 살다 죽었는데,

무덤이 있는 이곳에 그를 기념하여 4세기경에 교회당을 지었다.

 

 

 

 

 

 

 

 

 

 

요한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신심이 깊었던 사람이다.

예수가 박해를 받을 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도망친 야고보와는 달리 예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이다.

 

 

그는 44년경 박해를 피해 에페스로 와 초대 일곱 교회를 이끌며 영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는다.

95년 네로 시절, 기독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쓴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1년 6개월 후 유배생활을 벗어나 다시 에페스로 돌아온 다음 계속 복음을 전파하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성 요한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이사베이 자미, 다음 돌아볼 곳이다.

 

 

 

 

 

 

 

 

 

 

 

 

 

 

 

 

 

 

 

 

 

 

 

 

 

 

 

 

 

 

 

 

 

 

 

 

 

만일 내가 학창 시절처럼 아직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면 이곳은 특별한 의미로 내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유적지로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 와중에 대학생 시절 만났던 한 분의 목회자가 가슴에 떠오른다.

 이곳 셀축의 거리를 함께 걷고 싶은 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 직후까지 교회에 다녔다.

어린 시절엔 그냥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를 다녔는데,

대학생 시절부터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믿음의 증거를 원했고, 돌아온 답은 믿으면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궤변이었다.

성경의 창조론과 교과서의 진화론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이런 틈을 아무런 갈등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 친구들 태도 또한 나의 괴로움이었다.

 

 

그래도 내 인생의 좌표가 될만한 한 분의 목회자가 계셔서 쉽게 교회를 뛰쳐 나오지 못했다.

그분은 복음주의 편에 서 계신 분이셨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인간사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분은 늘 교인들의 신앙심을 키우는 것보다 그들의 열악한 경제 환경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셨고,

거들먹거리는 교회 내 권력들에 대해 냉소하시고,

교인들이 너무 몰려 교회가 비좁아질 것을 걱정하시고,

설교를 하시면서도 축구 경기 결과를 궁금해 하시는 그런 분이셨다.

대학생 수련회 때 그분은 화장실에 이런 낙서를 써붙이기도 하셨다.

_ 주여, 힘 주소서.

 

 

목사님과 사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는 교회를 떠났다.

항상 마음속엔 언젠가 찾아뵈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세월을 그냥 흘러보냈다.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찾아오셨다.

 커다란 빚을 지었다 생각하며 그후 찾아봬야지 생각했는데 또 실천하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갔고,

그분의 얼굴마저 희미해졌다.

그런데 작년, 다시 목사님의 이름이 내 앞에 등장하였다.

나꼼수의 김용민 교수가 그분의 장남이다.

 

 

 

 

 

 

 

 

 

 

 

 

 

 

 

 

 

 

 

정문, 의도하지 않게 입장료 없이 유적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터키는 얄미울 정도로 기독교 유적을 고리로 하여 관광객의 돈을 뜯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내가 한방 날렸다. 뭐 총수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진 못하겠지만.

 

 

 

 

 

 

 

 

 

 

 

 

 

 

 

 

 

 

 

이사베이 자미.

14세기 이곳을 점령했던 아이든 오울라르 부족의 수장인 메흐메트베이의 아들 이사베이가 건립.

 

 

 

 

 

 

 

 

 

 

 

 

 

 

 

 

 

 

 

어떤 종교든 그러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의 신앙심도 대단하다.

괴뢰메에서의 일이다.

어떤 물건을 사려고 슈퍼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구석에서 예배 시간에 맞추어 자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던 주인,

나를 보고 윙크 한 번 날리고 그 일을 계속한다.

나는 한참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질곡같은 우리의 삶, 그리고 구원.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종교는 그들이 주장하는 여러 것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정원에 있던 원형기둥.

자미와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 에페스의 특성에 따라 세워진 것이라 한다.

 

 

 

 

 

 

 

 

 

 

 

 

 

 

 

 

 

 

 

 

 

 

 

 

 

 

 

 

 

 

 

 

 

 

 

 

 

 

 

 

 

 

 

 

 

 

묘한 정적감이 돌던 자미.

나는 이번 터키여행을 끝내고 나서 기존에 갖고 있던 이슬람교에 대한 나의 시각을 상당히 수정해야만 했다.

자미는 마치 우리나라의 절간과 같이 평화롭고 온화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이슬람교도들은 모두 친절했고 배려심이 깊었다.

그렇다면 내가 숱하게 들어왔던 그 공격적인 자들은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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