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7(토)
기상(4:30)_ 아침식사(6:00)_ 오세암 출발(6:25)_ 마등렁(7:30)_ (공룡능선)_ 1275봉(9:15)_ 희운각대피소,점심(11:30-1:00)_ (가야동계곡)_ 오세암갈림길(2:29)_ 가야동대피소(5:20)_ 영시암(5:46)- 백담사(7:00)
목이 마르다.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 뒤척이니 친구 한둘이 맞장구를 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다시 눈들을 감는다. 밖에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확연하다. 잠을 아무리 청해도 눈이 감겨지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다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 다녀왔다. 결국 생각을 바꾸었다. 어제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잤으니 잔 시간은 5시간. 깊은 잠에 들었으니 이것으로 오늘 잠은 충분하다 생각하고 방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즐겼다.
새벽 6시 15분 전. 누구보다 일찍 식당으로 갔다. 밤새 내리던 빗줄기는 멈추었다. 생각보다 줄을 선 사람이 적다. 봉정암은 자는 사람이 많은 탓에 식사 시간도 신경이 쓰였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미역국에 오이 몇 개. 식단은 그곳이나 이곳이나 같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비로소 친구들이 얼굴을 비친다. 잠시 후, 우리는 오세암을 출발했다. 오세암 바로 위, 오른쪽으로 가면 봉정암이고 계속 오르면 마등령 삼거리다.
마등령으로 오르며 오늘의 설악산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새벽에 비가 내렸으니 공룡능선은 운해가 둘러친 환상적인 그림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등령 삼거리에 올라서니 힘찬 구름들이 하늘에 깔려 있다. 설악산의 준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휘파람을 불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왼쪽 동해바다 방향은 청명했고, 오른쪽 내설악 방향은 음침했다. 동해가 이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날씨가 수상해지기 시작하더니 바람이 불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잠시일거라 생각했지만 빗방울이 더욱 거세지고 바람 역시 더욱 세차게 불었다.
날카로운 능선상에 춤을 추는 빗줄기가 또렷하다. 어느 순간 그것은 눈발이 되어 날리고 있었다. 오들오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마치 시베리아 수용소의 포로들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사람들이 걷는다. 반대쪽 희운각에서 오른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각자 헤어진 지 오래다. 벌벌 떨며 각자의 능력에 따라 걷는 수 밖에 없었다. 빗줄기 때문에 카메라를 꺼낼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꺼내도 강한 바람에 카메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약간의 과장을 한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이 공룡능선상에 잠시 머무는 는 듯 했다. 몇 년 전, 10월 어느 날,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던 그날, 준비없이 이 능선에 올랐던 어느 산행객이 저체온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설악과 외설악 사이에 날카롭게 서 있는 공룡능선. 바람을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없다. 마치 강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다.
1275봉을 지나자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세차던 바람 역시 지형적인 특성에 따라 어느 정도 피할 수는 있었으나 몸이 떨리고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찬 빗줄기와 바람에 맞서며 공룡능선의 바위를 밟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 무릎에 무리가 갔다. 대청봉을 바라보니 구름 왕관을 썼고, 그 아래 죽음의 계곡엔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참고 즐기자. 그리고 희운각대피소.......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는다. 우리도 한켠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해 먹었다. 행복한 순간이다. 어제 저녁에 이미 배낭 속 술을 다 먹은 탓에, 이 방법 저 방법 다 동원하여 대피소측에서 소주 한 병을 얻어 얼다시피한 몸을 녹였다. 뒤돌아보는 공룡능선이 아련하다. 능선상에 있었을 때는 추위와 몸을 가눌 수 없는 바람에 치가 떨렸지만,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산행의 한 추억을 만든 기분이다.
아침 6시 정각에 정확히 아침 공양이 시작되었다.
오세암에서 가파른 길을 40분 정도 오르면, 그 다음 마등령 삼거리까지는 평탄한 길이다.
마등령 삼거리. 마등령은 왼쪽에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 비박을 하고 있던 팀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해쪽을 바라보니 검은구름 속에서 아침햇살이 부채처럼 퍼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오늘 우리가 걸을 공룡능선이 운해와 힘찬 구름으로 치장하리라 생각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등령삼거리를 출발했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아 이슬비같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바람이 거세어졌다. 간혹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 속에 빗줄기가 어렴풋이 보이다가, 그 빗줄기가 눈발로 변하곤 했다. 그 아름다운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었고 고통의 순간은 길었다.
공룡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1275봉 바위 아래 지점. 만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곳에서 비박을 했을 것이다. 산행객 둘이 추위에 떨며 우의를 매만지고 있다. 공룡능선을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오늘은 추위와 바람 탓에 그냥들 지나친다.
용아장성
대청봉 부분이 구름으로 가려져 있고, 그 아래 죽음의 계곡엔 눈이 쌓여 있었다.
희운각대피소. 발디딜 틈이 없었다. 대부분 대청봉을 거쳐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불순한 기후 탓인지 대부분 천불동계곡으로 하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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