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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행/안나푸르나

[lx3] 안나푸르나 트레킹 12일, 룸비니에 다녀오다

 

 

2009.11.17(화)

 

 

오늘은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에 다녀오기로 했다. 6시에 출발하려 했지만, 차가 늦게 온데다가, 문을 연 주유소 찾다 보니 실제 출발 시각은 8시가 되었다.

 

 

룸비니로 가는 길, 부처의 수행만큼이나 고행의 길이었다. 좋지 않은 산악도로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가는데, 적당한 휴게소도 없다. 대절한 미니버스도 고물이라 자리도 불편하고  속도를 못낸다. 그나마 차창밖으로 보이는 멋진 고산준령만이 위안이었다.

 

 

어느 순간, 산길이 끝나고 평야가 펼쳐진다. 영국군이 인도를 점령하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진하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산악지대를 만난다. 점령군은 본부에 전보를 쳤다. '점령했다. 그러나 앞에는 벽이다(but wall)' 이 일화에서 유래된 마을 '부트왈'. 이 곳에서 또 한참을 가 인도와의 국경 지대에 있는 싯달타의 탄생지 룸비니에 도착했다.

 

 

점심을 굶은 채, 룸비니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경. 무려 6시간을 넘게 달려 왔다. 이곳에는 여러 나라의 절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찰은 대성석가사. 우선 식당으로 달려갔다. 공양 시각은 12시. 음식이 있을 리 없다. 우리들이 준비해간 라면이라도 끓여달라고 네팔 관리인에게 부탁하고 있는데, 한국인 보살이 나타나 점심을 해결해 준다. 급히 밥을 지어 라면에 말아먹기.

 

 

점심을 먹고, 성지를 둘러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불교 역사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나는 불교 신자인 친구가 간혹 흘리는 정보에 띠라 보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싣달타가 태어난 곳. 정작 네팔은 현재 힌두교가 제 1종교인 탓에, 거의 버려져 있었다. 그러다 유엔의 지원 하에 유적지를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 1992년. 부처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모습이다. 불교 신자인 친구는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그러나 초라한들 어떠하리요. 어쩌면 해탈을 꿈 꾼 부처에게는 이런 유적지의 모습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복구비로 유엔이 지원한 돈을 네팔 정치인들이 상당액 떼어 먹은 사건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갔다. 가까운 친구가 교회를 나갔고, 집 가까이에 교회가 있었고, 신자가 아니지만 착하게 크라는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앞의 두 환경이 바뀌었다면 나는 절에 다닐 수도 있었고, 이슬람 사원에 다닐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 내 신앙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내 환경이 만든 것이다.

 

 

점점 자라면서 내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나가는 내 자신의 허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경도 여러 번 통독하고, 신앙서적 이것저것 사다 읽으며 노력했지만 영 믿음이 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나를 지배하고, 나를 종속시키는 그런 믿음에 대해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결국 교회를 떠났고, 여러 문제를 고민하는 가운데, 스스로 찾으려 하는 시간을 더 갖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경향은 기독교보다 불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차츰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는 불신자가 된 것도 아니다. 또 기독교의 반대편에 선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제도화된 종교를 갖고 싶지 않았으며, 내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는 가운데 예수와 부처를 만나고 싶었다.

 

 

포카라로 돌아오는 길, 재래시장에 잠깐 들려 장을 보았다. 지역은 네팔이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인도풍이다. 거리의 사람들 복장이나 얼굴 모습도 포카라 지역과는 완연히 다르다.

 

 

산악도로로 올라섰을 때, 운전사가 꾸물꾸물한다. 알고 보니 상향 전조등이 고장났단다. 조심성이 지나친 이 운전사 때문에 우리는 거의 기어서 왔다. 룸비니에서 4시 40분 경 출발했는데 포카라에 도착한 시각은 다음날 1시 경이다. 일행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이번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준비할 때,  룸비니 방문 계획이 애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트레킹 도중 우연치 않게 이야기가 나오면서 일정 가운데 추가가 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차라리 안나푸르나에 하루 더 머무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내 일생 중 과연 룸비니 같은 곳을 또 갈 일이 있겠는가 싶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 해도 만일 나 혼자만의 여행이었다면 나는 안나푸르나에 하루 더 머물렀을 것이다. 룸비니를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안나푸르나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곧 부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잠시 휴식을 하는데, 살아 있는 메기들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튀어먹겠다고 주인과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돌아올 때 시간이 너무 늦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말 아슬아슬한 절벽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창 밖의 풍경을 찍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워낙 꼬불꼬불한 길이 이어져 흔들리는 디카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창 공사중인 대성석가사 대웅전. 이 구조물이 완성되면 룸비니에서 가장 큰 사찰이 된다고 한다. 꼭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오른쪽으로 숙소가 보인다. 순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공양을 한다. 외국인들도 많았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설거지도 끝났다.

 

 

 

 

 

 

 

 

 

 

 

 

 

 

 

 

 

 

 학생들이 단체로 현장 학습을 왔다.

 

 

 

 

 

 

 

 

 

 주방. 한국식 문양을 지니고 있다.

 

 

 

 

 

 

 

 

 

 중국절 앞

 

 

 

 

 

 

 

 

 

 순례객들을 많이 마주쳤는지, 각국 인삿말을 다 알고 있던 친구. 물론 우리나라 인삿말도 알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친절히 포즈도 취해 주었다.

 

 

 

 

 

 

 

 

 

 대성석가사에서 20여 분 걸어간 곳에 있는 마야 데비 사원.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이곳에 '카필라바스투'라는 도시국가가 있었고, 그 국가의 궁궐에서 싯달타가 태어났다.

 

 

 

 

 

 

 

 

 

 

 

 

 

 

 

 

 

 

 보리수와 타르초(라마 불교의 오색 깃발). 보리수 아래서 좌선하고 있는 승려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250여 년 전,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대왕이 이곳에 와 참배를 하고, 돌기둥을  세웠다. 이른바 아쇼카 석주다.

 

 

 

 

 

 

 

 

 

 

 

 

 

 

 

 

 

 

 데비 사원 안에 있는 marker stone. 부처가 태어난 바로 그 지점.

 

 

 

 

 

 

 

 

 

 사원 내부

 

 

 

 

 

 

 

 

 

 

 

 

 

 

 

 

 

 

 

 

 

 

 

 

 

 

 우리를  감격케 했던 그 보살님......감사합니다.

 

 

 

 

 

 

 

 

 

 룸비니 숲동산을  벗어나 룸비니 박물관으로 갔다. 4시 20분 경이다. 그러나 아뿔싸! 4시에 문을 닫았다. 견학을 온 고교생들이 타고온 버스.

 

 

 

 

 

 

 

 

 

 견학을 마치고 나와 앞 노점상에서 서성이던 학생들이 이방인들의 출현에 관심을 갖기 시작.

 

 

 

 

 

 

 

 

 

 나도 그들의 버스에서 현장 학습. 아래 입은 바지는 네팔인들의 전통 옷으로, 트레킹이 끝난 후 포카라에서 200루피(약 3500원)를 주고 샀다. 면바지인데 조직이 무척 거칠다.

 

 

 

 

 

 

 

 

 

 

 

 

 

 

 

 

 

 

 

 

 

 

 

 

 

 

 

 위는 원래 짐을 싣는 칸이다. 그러나 차량이 많지 않은 탓인지 시골을 가다보면 저 위까지 사람이 올라탄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녀석들은 장난 삼아 올라갔는데, 선생님이 내려오라고 소리치자 실실 눈치를 보고 있다.

 

 

 

 

 

 

 

 

 

 이 녀석은 방학 때 알바로 포터일을 한다고 자랑을 했다. 반친구들 꽤나 괴롭힐 것 같았던 녀석.

 

 

 

 

 

 

 

 

 

 돌아오는 길에 들렸던 재래시장

 

 

 

 

 

 

 

 

 

 

 

 

 

 

 

 

 

 

 

 

 

 

 

 

 

 

 

돌아오던 길, 너무 늦었다. 아주 작은  어느 산골 마을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곁에서 물건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다. 처음 보는 물건들을 팔고 있었는데 아는 것이라곤 물과 까치담배 뿐이었다. 친구와 함께 이상한 잎에 싸서 씹어 먹는 작은 열매를 샀다. 나중에 알고보니 각성제란다. 할 일 없이 서성이던 젊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우리 버스 근처를 서성거렸다. 심심하던 차에 이방인들이 들이닥치자 무슨 건수라도 없나 하는 눈치다.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었다. 버스가 떠나는 데 한 녀석이 ' 잘 감사해요'한다. 이 시골 마을까지 한국어가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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