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백담사_ 공룡능선_ 천불동계곡 비박산행 2일
2012.10.7(일)
비박지 출발(7:50)_ 1275봉(10:15)_ 무너미고개(1:55)_ 양폭대피소(5:00-5:20)_ 소공원 입구(6:30)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불현듯 스틱 생각이 났다.
어제 비박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맬 때 비박배낭을 처음 내려놓은 곳에 스틱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 보니 그대로 있다.
스틱을 잃었다면 내 체력으로 비박배낭을 메고 어떻게 공룡을 넘는단 말인가?
비박지를 떠날 때 안개가 자욱했다. 만일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공룡에서의 조망은 꿈을 접어야 한다.
마등령삼거리에 올라서니 짙은 안개로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다.
걸음을 능선으로 옮기려 할 때, 잠깐 하늘이 갠다. 걱정 반 설레임 반으로 길을 나선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가 있었다.
서북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희망을 갖자.
2년 전 단풍 절정기라 불리울 때 이 능선을 넘으며 무척 고생했다.
강한 바람과 혹독한 추위에 떨었고, 엄청난 인파에 떠밀렸고, 떨어진 단풍을 보며 실망했다.
그러나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고 산행객도 적당하다.
게다가 단풍까지 받쳐준다.
다시 절망의 순간으로
코 앞의 단풍만 구경하며 공룡의 등을 타고 넘으란 말인가?
어느덧 공룡능선에서 가장 힘들다는 1275봉에 올랐다.
한숨 돌리고 다시 신선대 방향으로 향한다.
다시 희망의 동앗줄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단풍이 절정이라고 말할 때 그곳으로 떠나면 이미 단풍이 지고 있을 때가 많다.
다음주면 절정이겠구나 하는 바로 그때가 능선상의 절정기다.
동해쪽으로도 시야가 확보된다.
울산바위가 저 멀리 서 있다.
아아 배 고프다.
귀때기청봉이 정면에 나타났다.
작년 단풍기에 걸었던 봉우리, 내년에는 저곳에 갈 것이다.
그래, 단풍은 바위와 어우러져야 제맛이야.
어제부터 계속 머리에 맴도는 당연한 진리.
설악산의 속살까지 붉게 물들고 있다.
설악산의 제1봉인 대청봉이 보인다.
그곳으로부터 단풍의 물결이 밀려내려오고 있다.
단풍은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그것에 의해 가려져 있던 색소들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1년 내내 쌓였던 노폐물들을 정리해 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버려야 할 것을 부둥켜안지 않고 버리기 때문이다.
공룡능선 신선봉에 이르렀을 때, 하늘은 청명해졌다.
공룡능선을 처음 올라탈 때 앞길을 방해하던 안개는 모두 사라졌다.
앞에 우뚝 솟은 1275봉과 그 주위의 봉우리들이 우람하게 서 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울림이다.
같은 듯 다른 색깔로 어울리고 있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
산허리에 깔리는 장미빛 노을, 또는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된다 .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
혹은 거칠게 , 혹은 맑게 , 내가 싫다고는 말 못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 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구름 떠도는 바람 부는 날이면 된다 .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 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
담배 한 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
떠돌이 신세로.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곳 ,
들새가 가는 길 , 표범이 가는 길을 나는 가야겠다 .
껄껄대는 산사나이들의 신나는 이야기와
그리고 기나긴 눈벼랑길을 다 하고 난 뒤의 깊은 잠과
달콤한 꿈만 내게 있으면 그만이다 .
바람이 인다.
새해 아침 먼동이 트면서
저기 장미빛 노을이 손짓한다.
배낭을 챙기자.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내가 공룡능선을 처음 걸은 때는 혹한기였고,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던 날이다.
그날 혼자 걸으며 공룡능선의 매력에 한없이 이끌렸고, 그후 2년에 한 번 정도는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처음 걸었을 때만큼의 감동을 그후 받지 못했다.
다시 와서가 아니라 날씨가 받쳐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르다. 눈이 단풍으로 대체되어 마음에 깊은 감흥을 준다.
가야동계곡과 귀때기청봉도 이제 이별을 해야 할 시간
신선봉 앞에서 귀인 두 분을 만났다.
우리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출발해, 점심을 희운각대피소에서 먹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산행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심 시간이 지났고 허기가 졌다.
우연히 이곳에서 만난 두 분에게서 먹을 것 몇 가지를 얻었다.
신선봉을 지나 무너미고개, 희운각으로 가지 않고 우리는 그냥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섰다.
하산 시각이 너무 늦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불상과 같은 바위가 천 개나 된다는 천불동계곡
천불동을 늦은 시각에 내려오면
봉우리만 햇빛을 받고 골짜기는 어두워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어려움이 따른다.
양폭산장이 있던 자리. 지난 1월 화재로 전소되었다.
폭설이 내렸을 1월 설악에서의 화재라니.......
게다가 벌써 9개월이 지났는데 복구가 되지 않고 있다니.......
오색 단풍이 비취색 계곡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신선이 누워 넋을 잃은 채 설악산을 구경하다 하늘로 올랐다는 비선대.
고교 2학년 때 친구 둘과 함께 처음 설악산을 찾았고, 첫 발걸음 한 곳이 바로 이 비선대였다.
한 친구는 멀리 독일로 이민을 갔고, 또 한 친구는 같은 서울 아래 있으면서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비선대는 변함 없는데 우리는 변했다.
비선대 옆의 식당, 맥주 한 잔에 국수 한 그릇.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출발해 이제 점심 겸 저녁을 먹는다.
눈과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찼지만 위장은 서글픈 날이었다.
신선봉 앞에서 만난 두 분 가운데 한 분이 발톱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며 내려오신다.
두 분을 부리바에게 맡기고 나는 차편을 알아보려 먼저 하산한다.
또다시 설악산에서 비박할 날을 꿈꾸며.